최근 한 유튜버의 KTX 관련 논란을 보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

당시 행동이 적절했는가를 묻는다면 나 역시 과한 부분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면 자신의 경험을 공개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에서도 조금 더 신중했어야 한다.

그런데 논란이 며칠 동안 이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사건 자체와는 조금 다른 질문이 생겼다.

이 일이 정말 이렇게 오랫동안 유튜브와 언론, 커뮤니티가 반복해서 다뤄야 할 만큼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사건이었을까?

처음에는 특정 행동에 대한 비판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과거의 이야기들이 다시 등장하고,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기사화되고, 댓글이 새로운 콘텐츠가 되고, 그 콘텐츠를 또 다른 유튜버와 언론이 받아 재생산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한 개인의 실수가 하나의 사건을 넘어 며칠 동안 계속 생산하고 소비할 수 있는 작은 산업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한 개인의 실수는 왜 며칠짜리 산업이 되는가 — 분노와 관심을 돈으로 바꾸는 콘텐츠 시대

 

한 사람의 실수가 ‘콘텐츠 시즌’이 되는 과정

요즘 하나의 논란이 커지는 과정을 보면 대체로 비슷하다.

누군가 실수를 한다. 관련 영상이나 글이 올라온다. 사람들이 반응한다. 조회수가 높아진다.

그러면 다른 콘텐츠 제작자들이 같은 사건을 다루기 시작한다.

‘논란 정리’, ‘진짜 이유’, ‘새롭게 밝혀진 사실’, ‘과거 발언 재조명’, ‘사람들이 분노한 이유’ 같은 제목의 콘텐츠가 연이어 등장한다.

언론도 온라인에서 관심이 높다는 이유로 기사를 만든다. 커뮤니티에서는 그 기사가 공유되고 새로운 댓글이 달린다. 다시 그 댓글과 여론을 소재로 새로운 영상과 기사가 만들어진다.

사건 → 유튜브 → 커뮤니티 → 언론 → 댓글 → 다시 유튜브

이 순환이 반복되다 보면 어느 순간 처음의 사건보다 사건을 둘러싼 반응이 더 큰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처음 무엇이 문제였는지는 점점 흐려진다.

 

그 기저에는 결국 ‘돈’이 있다

유튜버가 돈을 버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언론사가 수익을 내는 것도 당연하다. 콘텐츠 제작자에게 조회수와 광고수익은 생존의 문제일 수도 있다.

문제는 사람들의 분노와 호기심이 오래 지속될수록 경제적으로 유리해지는 구조다.

조회수가 높으면 광고수익이 늘어난다. 화제가 되는 영상을 만들면 구독자가 늘 수 있다. 언론 역시 사람들이 많이 클릭하는 기사를 계속 생산할 유인을 갖는다.

플랫폼도 사람들이 오래 머물고 많이 반응하는 콘텐츠를 더 많이 노출한다.

각자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나름대로 합리적인 선택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들이 모이면 이상한 결과가 만들어진다.

한 사람에게는 인생의 위기인데, 다른 누군가에게는 며칠 동안 계속 만들 수 있는 콘텐츠가 된다.

처음 사건을 다룬 사람도 수익을 얻고, 그 사람을 비판하는 콘텐츠도 수익을 얻고, 다시 그 비판을 반박하는 콘텐츠도 수익을 얻는다.

언론은 온라인 반응을 기사화하고, 또 다른 콘텐츠 제작자는 그 기사를 근거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든다.

이쯤 되면 사건의 크기보다 얼마나 오래 사람의 관심을 붙잡을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해진다.

 

분노는 너무 효율적인 콘텐츠다

복잡한 사회문제를 설명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제도의 문제를 이야기하려면 배경을 설명해야 하고, 여러 입장을 살펴야 하며, 자료도 확인해야 한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분노는 훨씬 단순하다.

‘누가 잘못했다.’

‘이 사람은 문제가 있다.’

몇 초면 이해할 수 있고 댓글을 달기도 쉽다.

사람들은 화가 나면 더 오래 머무르고, 다른 사람의 반응이 궁금해지고, 다음 콘텐츠를 찾아본다.

그래서 분노는 콘텐츠 산업에서 매우 효율적인 감정이 된다.

반대로 이런 이야기는 큰 관심을 얻기 어렵다.

“잘못은 충분히 비판했다. 이제 책임을 인정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면 다시 살아갈 기회를 주자.”

이 이야기는 사건을 끝내는 방향으로 간다.

그런데 사건이 끝나면 콘텐츠도 끝난다.

반면 새로운 의혹과 새로운 과거, 새로운 분노는 이야기를 계속 연장한다.

인간적으로는 사건이 정리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콘텐츠 경제에서는 사건이 오래 지속될수록 이익을 얻는 사람들이 생긴다.

 

잘못의 크기와 관심의 크기는 같지 않다

우리는 많은 사람이 이야기하는 사건을 자연스럽게 중요한 사건이라고 느낀다.

하지만 관심의 크기와 사회적 중요성은 전혀 다른 문제다.

유명인의 비교적 작은 실수 하나가 며칠 동안 수많은 콘텐츠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반면 몇 년 동안 지켜봐야 할 사회적 참사, 안전 문제, 제도의 실패, 권력의 잘못은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의 관심에서 빠르게 사라지기도 한다.

사람의 감정을 즉각적으로 자극하는 사건은 빠르게 확산된다.

그러나 오랜 시간 지켜보고 확인해야 하는 문제는 재미가 없다. 사건 이후 제도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약속했던 개선이 실제로 이루어졌는지를 확인하는 일은 큰 화제가 되기 어렵다.

그래서 이상한 역설이 생긴다.

오래 기억할 필요가 없는 일은 지나치게 오래 소비되고, 정말 오래 기억해야 할 일은 너무 쉽게 잊힌다.

 

언론은 대중과 함께 흥분하는 곳이어야 할까

개인 유튜버나 콘텐츠 제작자에게만 책임을 돌릴 수는 없다.

오히려 이런 시대일수록 언론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

대중의 관심을 따라가는 것은 언론의 한 기능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이 언론의 역할이라면 커뮤니티나 개인 채널과 크게 다를 이유가 없다.

언론은 오히려 대중이 흥분하고 있을 때 한 번쯤 냉정하게 물어야 하지 않을까.

이 사건은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중요한가.

지금 새롭게 보도하는 내용에 실제 공익적 가치가 있는가.

잘못의 크기에 비해 지나친 사회적 제재가 가해지고 있지는 않은가.

사건과 직접 관계없는 과거까지 끌어오는 것이 정당한가.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실제로 개선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언론이 해야 할 일은 대중보다 더 크게 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흥분할수록 사실과 비례감, 균형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정치적 성향을 막론하고 그런 균형감을 찾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다.

자신과 가까운 사람의 잘못에는 관대하고,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이나 반대편에 있는 사람에게는 훨씬 엄격해지는 선택적 잣대도 흔하게 볼 수 있다.

좌와 우의 문제라기보다 자신이 이미 믿고 있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이야기를 더 강하게 소비하는 시대의 문제에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용서하되 사건은 기억할 수 없을까

그렇다고 모든 사건을 빨리 잊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사회에는 반드시 오래 기억해야 할 사건들이 있다.

사회적 참사와 반복되는 안전사고, 제도적 부조리, 권력의 잘못과 구조적인 실패는 시간이 흘렀다는 이유만으로 사라져서는 안 된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두 가지를 섞는다.

한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것과 사회가 사건을 기억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잘못한 사람이 자신의 행동을 인정하고 필요한 책임을 지고 같은 행동을 반복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다시 살아갈 기회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사건에서 배워야 할 교훈까지 함께 잊을 필요는 없다.

사람은 용서하면서도 사건은 기억할 수 있다.

사건을 기억하면서도 한 인간을 평생 응징할 필요는 없다.

 

건강한 잊음과 위험한 잊음

잊는 것에도 두 종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건강한 잊음이 있다.

잘못한 사람이 충분히 책임을 지고 반성했다면 대중이 그 사람에 대한 집착을 거두고 다시 살아갈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리고 위험한 잊음이 있다.

사회적으로 반드시 고쳐야 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는데도 시간이 지났다는 이유로 관심을 거두고 결국 비슷한 일이 반복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미디어 환경에서는 이 두 가지가 때때로 거꾸로 작동하는 것 같다.

사람의 실수는 오래 붙잡고, 구조적인 문제는 빨리 잊는다.

한 개인에게는 얼굴이 있고 성격이 있고 가족이 있고 과거가 있다. 계속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다.

반면 제도 개선, 안전 절차, 예산, 정책 이행 같은 문제는 얼굴이 없다. 흥분할 대상도 명확하지 않다.

그래서 사건이 한창 뜨거울 때는 모두가 말하지만 몇 달 뒤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급격히 줄어든다.

그 사건 이후 무엇이 바뀌었는가.

당시 약속했던 개선은 이루어졌는가.

같은 문제가 다시 발생하지 않고 있는가.

당시 지적된 구조적 문제는 해결됐는가.

어쩌면 언론의 가치가 가장 필요한 순간도 사건이 폭발했을 때가 아니라 모두가 잊기 시작했을 때인지 모른다.

 

잘못에는 책임이 필요하지만 책임에도 끝은 있어야 한다

요즘 여러 논란을 보면서 느끼는 또 하나의 불편함은 우리 사회가 잘못을 발견하고 비판하는 데에는 매우 능숙해졌지만, 그 책임이 어디에서 끝나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는 데에는 점점 서툴러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과를 요구한다.

사과하면 진정성이 없다고 한다.

활동을 멈추면 도망갔다고 하고, 시간이 지난 뒤 다시 활동하면 벌써 돌아오느냐고 한다.

이런 구조에서는 사실상 출구가 없다.

물론 사과 한마디로 모든 책임이 끝나는 것도 옳지 않다.

잘못의 크기에 맞는 책임이 필요하고, 피해가 있다면 회복을 위한 노력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필요한 책임을 다한 사람에게조차 다시 살아갈 길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반성을 요구하는 사회가 아니라 추방을 요구하는 사회에 가까워질 수 있다.

잘못에는 책임이 있어야 하지만, 책임에도 언젠가는 끝이 있어야 한다.

 

무엇을 놓아주고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결국 문제는 돈 자체가 아니다.

유튜브도 언론도 콘텐츠 산업이고, 관심이 수익으로 이어지는 것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그 과정에서 사람과 사건을 어떤 태도로 다룰 것인가이다.

조회수가 나온다는 이유로 한 개인의 실수를 끝없이 소비하지 않는 절제.

정치적 성향이나 개인적인 호불호를 떠나 잘못의 크기에 맞게 비판하는 비례감.

잘못을 인정한 사람에게는 다시 살아갈 기회를 주면서도 사회가 배워야 할 교훈은 오래 기억하는 태도.

그리고 사람들이 당장 관심을 갖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가 잊어서는 안 되는 문제를 꾸준히 기록하고 추적하는 언론과 콘텐츠.

이런 것들이 지금의 관심경제에서 필요한 균형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쩌면 건강한 사회는 가장 크게 분노하는 사회가 아닐지도 모른다.

무엇은 이제 놓아주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은 끝까지 기억해야 하는지를 구별할 줄 아는 사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큰 분노가 아니라 그런 균형감인지도 모르겠다.